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구치 모모에 (문단 편집) ==== 국민 스타가 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JHsLhkPOMw, height=240)]}}} || || ''' [[요코스카 스토리]] ''' || >그는 기타를 들고 있었고, 그가 즉석에서 만든 노래를 불러주었다. > >그것은 꽤 짧은 노래였다. > >어린 소녀에게 어른이 되자고 부탁한 조용한 노래였는데, 사랑에 빠졌으면,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녀가 그것에 대해 말해 줄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 >'우자키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누군가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은 것도 처음이었고, 매니저와 감독에게 소망을 전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 >― 자서전 "푸른 시절"에서 [[1976년]] 그녀의 인기가 더욱 더 높아짐에 따라,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녀의 경력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얻게 되었고, 그녀 자신의 노래의 [[작곡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선택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우자키 류도였다. 그녀는 다운타운 부기 우기 밴드가 녹음한 그의 노래 "눈물의 시크릿 러브(涙のシークレット・ラヴ)"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 당시 우자키 류도의 이미지는 선글라스를 쓴 [[록 음악]] 가수로 모모에의 관계자는 기겁을 했다. 모모에는 여고생 아이돌이고 두 사람의 이미지와 스타일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모모에 스탭들은 그녀의 바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당시에 우자키는 신인이었고 그의 아내 아키는 "아직 10대의 톱 아이돌이, 우리와 같은 신출내기에게 스스로 곡을 써달라고 말할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https://news.1242.com/article/112779|#]][* 은퇴 이후에 아키와 우자키가 모모에와 오랫만에 재회해서 같이 식사를 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곡을 의뢰한 것은, 모모에 씨 자신이다, 라고 하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정말입니까?"라고 물었고, 모모에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아키는 "그 시절 아이돌이면서도 사무실에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 결혼·은퇴도 그렇지만, 모모애 씨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news.1242.com/article/112779|#]]] 그러나 모모에의 스탭들은 결국 그녀의 소망에 굴복했고, 실험적으로 우자키 류도의 노래를 주문하여 앨범을 만들었다. 몇몇 곡들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요코스카 스토리]]"였다. 이들의 첫 번째 콜라보레이션은 1976년 우자키가 그의 아내 아키 요코가 작사, 작곡한 [[요코스카 스토리]]가 되었다. 아키는 이 곡을 쓰게 된 계기는 원래 이 곡이 주문되었을 때 만난 적이 없었던 그녀와 야마구치 둘 다 요코스카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야마구치 모모에의 전성기 시절 작품 대부분은 아키 요코와 우자키 류도 콤비가 만들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의 협업은 그들에게는 큰 기회였고, 그들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작사, 작곡이 되었다.[* 이후 아내 아키 요코는 2006년 [[자수포장]]을 수상한다.] 요코스카 스토리는 요코스카 마을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소녀가 [[첫사랑]]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과 같은 [[사춘기]]적 시각에서, 박동감 넘치는 록 비트를 동반한 이 노래의 활기차고 힘찬 세계는 모모에가 그 동안 부르던 노래와 분명히 구별되었다. 요코스카 스토리는 싱글 판매량에서 60만 장 이상 판매하며 가장 큰 인기를 끌었고, 차트 1위를 정점을 찍었다. 이 곡을 통해 새로운 야마구치 모모의 세계가 태어났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이돌에서 진정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되는 음악이었다. 이 노래로 '소녀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 아키와 우자키의 노래를 통해 가수로서 한 단계 진화한다. 이전까지는 조숙한 여자 아이돌 이미지였다면 요코스카 스토리 이후의 야마구치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깨끗하게 지금을 사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며 여성팬들의 지지도 늘어나게 된다. 이 부부가 제작한 노래들은 연속으로 대박 히트를 치게 되며 이때부터 앨범의 퀄리티도 완벽하게 상승하며 당시 [[소니]]의 기술력이 더해져 당시 아이돌계의 최고의 앨범 퀄리티를 자랑했다. 이때부터 만들어진 그녀의 최고 작품들은 여전히 시대를 초월하여 특별하게 들린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가 된 이유는 그녀의 극적인 은퇴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음악에 있다. 히트 싱글들도 많지만 그녀가 대단한 점은 그녀의 [[앨범]]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앨범에서 모모에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으며 당시 일본 아이돌 가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소울 음악]], [[록 음악]] 가릴거 없이 많은 장르를 앨범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폭넓은 그녀의 장르 스펙트럼은 후세의 [[일본 아이돌]]의 다양한 콘셉트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한마디로 당대의 일본 아이돌의 [[선구자]]적인 존재이다. [[1976년]] 말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에 영화 슌킨 이야기의 골든 콤비 미우라 토모카즈와 함께 영화에 기용된다. 흥행 수입 8억 8,400만엔에 흥행 8위를 기록한다. 또 다시 영화를 히트시키며 흥행 불패 기록을 이어간다. 1977년 1월 17일, 그녀의 18번째 생일 파티로 도쿄 히비야의 일본 프레스센터 홀에서 참가자 300명이 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연예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참석했으며 우츠이 켄, 쿠사후리 미쓰코, 아키 요오코 등이 참석했다. 모두 그를 친분이 깊은 연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형국이다. 이제 18세밖에 안 된 젊은 연예인을 위해 거물급 유명인사들이 스케줄을 조정해 파티에 참석했다. 그의 18번째 생일에는 총 300명이 넘는 연예인들이 모이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당시의 연예계의 있어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의 크기를 상징하는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출석일수가 부족해 고등학교 [[졸업]]을 못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급우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모에는 졸업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동급생이 모두 졸업해 버린 학교에, 모모에는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 4월부터 계속 다녔으며 6월에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졸업 당시 사진 [[파일:D-EJEyiUYAIvaG5.jpg]]] 이 졸업식에 어머니도 참석한다. 1977년 3월 27일에는 '꽃의 고3 트리오'가 해산하게 된다. 이 셋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나의 단락으로 보고 개개인이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데뷔 당초는, 비슷한 노선을 걷던 3명이었지만, 이제는 이미 각각의 캐릭터도 확실히 확립되어 있어, 이미 트리오라는 묶음에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본 무도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3명이 모여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다. 모모에, 쥰코, 마사코의 3명은 각각 많은 스케줄을 조정하고, 해산 콘서트를 향한 준비에 힘을 쓰고 있었다. 셋은 콘서트 마지막에 억제할 수 없었던 눈물을 참으면서, 손을 잡고, 계속 노래했다. [[1976년]]은 가수로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다시 한번 반등하게 되는 해다. 먼저 요코스카 스토리가 대박을 치며 3회 연속 홍백가합전에 출장하며 다시 한번 상승세를 타게 된다. 요코스카 스토리 이외에 이 해에 나온 히트곡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CgmSNG6DpdQ|사랑에 달리고]]/[[https://www.youtube.com/watch?v=nJ1eb5S0vfU|붉은 운명]]과 [[https://www.youtube.com/watch?v=gH_Oz9kmXgI|펄 컬러에 흔들리고]], [[https://www.youtube.com/watch?v=5eElPGbTlA8|붉은 충격]]이 있다. 요코스카 스토리와 붉은 충격은 하프 밀리언이 넘는 대히트를 거뒀고, 사랑에 달리고와 세번째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한 펄 컬러에 흔들리고도 40만장이 넘어 히트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되는 해가 된다. '''노래, 영화, 드라마 모두 히트시키며 당대의 국민적인 톱스타 위치에 오른것도 이 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는 젊은 층에 한정된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넓은 팬층을 자랑했다. 그만큼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리고 남녀의 구별 없이 사랑을 받았다.[[http://www.ffortune.net/social/people/nihon-today/momoe.htm|#]]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GZRvjXo2lA, height=240)]}}} || || ''' [[秋桜|코스모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kakaotv(300761832, height=240)]}}} || || ''' [[몽선안내인]] ''' || [[1977년]]은 그녀가 가수로나 배우로나 한층 더 성장해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가 된 해다. 7월 30일 개봉한 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은 9억엔을 기록하며 또 다시 흥행을 성공시킨다. 8월 25일에는 제3회 일본 TV 페스티벌에서 톱 아이돌을 수상했고 이 해에 나온 가장 대표적인 히트곡이 바로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코스모스(秋桜)>다. [[사다 마사시]]가 제공한 곡으로 이 가사의 내용은 원래 사다 마사시의 여동생 사다 레이코의 이야기로, 레이코가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 그걸 걱정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모모에는 가족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기에 이 곡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훗날 결혼을 앞두고 "이 곡을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사다 마사시에게 이야기하며 그 노래를 은퇴 콘서트에서 불렀다. 4월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슌킨 이야기가 [[칸 영화제]]에 출품하게 되기도 했으며 5월 16일에는 칸 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한다. 6월 19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여섯 번째 도쿄음악제(도쿄음악세계대회)가 개최됐다. TBS의 도쿄 음악제 하면 [[야마하]] 주최 세계 가요제와 함께 일본에서 개최된 양대 국제 음악제로 자리매김하는 권위 있는 음악제다. 레코드 대상과 같이 얼마나 팔렸는가를 평가하는 음악제가 아닌, 노래의 퀄리티, 가창력에 중점을 두어 평가되는 대회로서 알려져 있다. 모모에 역시 이 음악제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당시 노미네이트 된 가수로는 [[사와다 켄지]], 오오하시 준코, 시미즈 켄타로 등 장장한 멤버였다. 그랑프리를 차지한 사람은 두 사람의 맹세의 마릴린 맥과 빌리 데이비스 주니어. 그리고 그 결과 외국인 아티스트가 다수 출연해 수상하는 가운데 무려 일본인인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른 '[[몽선안내인]]'이 당당히 동상을 수상했다. 이미 배우로서도 한층 성장을 거둔 야마구치 모모에였는데 가수로서도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이 해에도 많은 히트곡을 내게 되는데 몽중안내인, 코스모스 모두 판매량이 40만장을 넘었고 첫사랑 책, 붉은 인연도 20만장을 넘는다. 또 이 해에 나온 또 다른 히트곡이 바로 [[https://www.youtube.com/watch?v=kPM0-LShU9E|이미테이션 골드]]다. 이 곡도 48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보여주며 모모에가 발매한 싱글 중 이 해에 가장 큰 히트곡이 되며 [[https://www.youtube.com/watch?v=YcLyav4OV00|홍백가합전에 4회 연속]]으로 출장한다. 이때 입으려고 했던 드레스가 [[도난]] 당해서 다른 옷으로 입고 출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77년 12월에는 붉은 시리즈의 6탄 '붉은 굴레'가 방영된다. 이 드라마 역시 역대급 성공을 거둔다. 평균 시청률 29.5%. 최고 시청률 32.4%. 시리즈 최고 성적이었으며 모모에 커리어 최고 시청률이었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의 반열에 오른다. 12월에는 추리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 원작의 [[서스펜스]] 영화 '안개의 깃발'이 개봉한다.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골든 커플의 영화 제7편이 정해졌다. 모모에 영화라면 순애노선이 정평이었지만, 현대극에 도전하게 된것이다. 전작의 히트를 이어 받아 [[도호]] 영화는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마츠모토 세이초의 서스펜스에 도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니시카와 카츠미는 야마구치 모모에에게 이 역을 맡기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모에 자신이 꼭 하고 싶다고 희망해 이 영화가 성사됐다고 한다. 이미 요코스카 스토리의 대히트로 가수로서는 아이돌의 이미지를 탈피한 야마구치 모모에였다. 모모에는 당시 이 역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20대라도 정신적으로는 30대 같은 여자의 집념을 표현하는 역은 매우 불안하지만, 노래에도 여러 가지 레퍼토리가 있듯이, 이런 역할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모모에 영화 최초 현대극 도전이라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 공개에 앞서, 주연 야마구치 모모에와 공동 출연자인 미우라 토모카즈에 의한 히트 기원이라는 떡메치기가 [[신주쿠구|신주쿠]]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로 방대한 수의 팬이 모이는 것으로 예상은 끝난 상태지만 떡메치기 당일이 되어 보니 합리적으로 예측한 것보다 야마구치 모모에를 보려고 훨씬 많은 거대한 군중이 한꺼번에 신주쿠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리자 영화 관계사의 요청을 받은 요츠야 [[경찰서]]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경찰]]이 출동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떡방아는 불과 3분 만에 끝났다. 경찰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이 영화 역시 히트를 치며 흥행 수입 8억 8,900만엔. 흥행 8위를 거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usaiK7SNS8, height=240)]}}} || || '''시대를 뛰어넘은 명곡 <[[プレイバック Part2|플레이백 파트 2]]>^^(1978)^^'''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1vE4PRViEJM, height=240)]}}} || || '''[[일본국유철도|{{{#ffffff 일본국유철도}}}]]의 캠페인이자 동명의 캠페인 송이었던 <[[좋은 날 여행]](1978)>''' || [[1978년]]은 야마구치 모모에가 인기 스타에서 일본 연예계 최정상의 군림하게 된 해다. 1월에는 처음으로 [[오사카부|오사카]] 지역에서 모모에짱 축제를 개최한다. 1월 28일, 29일의 2일간 한정으로, [[오사카]]인을 초빙한 모모에 축제가 열렸다. 그 내용은 전년도에 신주쿠 팽이에서 개최된 제3회 모모에짱 축제와 거의 동일하다. '제3회 모모에짱 축제'는 TV로 방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텔레비전으로 그 내용을 보고 있는 팬도 많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오사카 코마 극장은 사막에 끓은 샘물처럼 군중이 몰려들고 있었다. 뮤지컬 거미 마을, 히트 퍼레이드 모모에와 함께 2부 구성. 티켓은 [[매진]]으로 대성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뿐인 공연이 된 오사카 모모에짱 마츠리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3월에는 3시간 드라마 [[시대극]] 바람이 불탔다에 미우라 토모카즈와 함께 주연으로 기용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후처 이토 우메코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로 미우라 토모카즈가 [[이토 히로부미]] 역할을 맡았으며, 모모에는 그의 부인 이토 우메코 역할을 맡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청년기, 장년기로 나누어 2부로 구성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 34.4%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당시 모모에의 인기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대 일본 최고의 거물급 [[작가]] 중 한 명인 노사카 아키유키[* 대표작은 그 유명한 [[반딧불이의 묘]].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했으며, 참의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극찬한것이다. 이 둘은 1978년 4월 4일 NHK에서 방송된 '빅쇼'에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19세였고, 노사카 아키유키는 47세였다. 노사카는 이 방송에서 계속 야마구치 모모에를 [[존댓말]]로 대했다.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를 만난 것을 "너무 영광스럽다" "차츰 마음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고집이 대단한 그가 모모에를 극찬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노사카는 아직 10대인 야마구치 모모에를 내세워 "전후 첫번째 스타다. 화려함을 지닌 15대 우자에몬 이치무라[*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국민 [[가부키]] 배우.]다"라고 절찬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는 또 모모에를 보고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면 작사 작곡가의 재능을 뛰어넘어, 무엇을 불러도 야마구치 모모에가 된다." "정신적으로 뼛골이 굵어 외형적으로 쓸쓸하면서도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무대에 서면 다른 스타가 희미해져 버린다."라고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을 앞에 두고 대절찬의 말을 보냈다. 또 그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상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높은 신분과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 [[귀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노사카는 모모에를 보고 "아름답고, 품위 있고, 윤기 있고, 당신(야마구치 모모에)에게 딱"이라고 말했다. [[https://gamp.ameblo.jp/sataiya/entry-10045995192.html|관련 문서]] 5월 1일에는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플레이백 파트2]]'를 발매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냉담하고 무정한 음색, 표정,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는 가히 혁명적으로 쿨&시크 그 자체였다. 이 노래마저 하프 밀리언이 넘는 히트를 기록하며 8월 24일 제4회 일본 TV 페스티벌에서 톱 아이돌 상과 감투상을 수상한다. 9월 1일에는 그녀의 대표적인 명반 앨범인 '드라마틱'이 출시된다. 당시 소니의 기술력으로 야마구치 모모에 사운드의 최절정을 달한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11월 15일 플레이백 Part.2로 제9회 일본가요대상 방송음악상을 수상한다. 또한 이 해에 나온 또 다른 히트곡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dK5VmU9cUtE|절체절명(絶体絶命)]]'이 있다. 이전까지 시도했던 록 음악에 실험적인 요소를 접목시켰는데 37만장이 넘으며 역시 히트한다. 11월 21일에는 [[일본국유철도]]의 테마송으로 나온 <좋은 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 현재 [[도카이도 신칸센|도카이도]], [[산요 신칸센]] [[JR 서일본]] 소속의 차량의 차내 멜로디로도 쓰이고 있다.]>이 전일본적인 히트를 치면서 그야말로 '''국민 가수'''로 발돋움한다. 당시 거물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걸작]]으로 누계 매출은 100만장을 기록하고 누계로는 야마구치 커리어 가장 큰 히트 곡이되었다.[* 그러나 오리콘 집계에서는 53.6 만매로 요코스카 스토리 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일본 음악 사상 최고의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 노래로 2006년에는 [[PTA]]가 선정한 일본의 노래 100선에도 선정됐으며[[https://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6%AD%8C%E7%99%BE%E9%81%B8|#]], 2016년에는 [[뮤직 스테이션]]이 발표한 '일본에 영향을 준 노래'에서 1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https://theqoo.net/japan/329303346|#]] 햇병아리 아이돌을 넘어서 확고부동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곡의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졌는데, 그녀가 선택하여 취입한 노래들은 지금도 일본 가요계를 빛내주는 명곡들이다. 모모에는 영리하게 타니무라 신지, 우자키 류도/아키 요코 콤비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녀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힌다. 고작 10대의 안목과 비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위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노련했던 것이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압도적 인기와 실력은 일본 가요사의 역사마저 바꿔놓았다. 바로 19세의 나이에 [[NHK 홍백가합전]]의 홍팀 토리(마지막 무대)를 맡게 된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녀가 탑스타지만 너무 어리지 않냐라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2000년대]], [[2010년대]] 들어서 위상이 떨어진 홍백가합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시의 섣달 그믐날의 [[NHK 홍백가합전]]이라고 하면, 가족 전원이 한자리에 모여 그것을 보면서 해를 보내야 한다는 일본의 [[전통]] 행사라고 해도 좋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당시 홍백의 평균 시청률이 무려 70%가 넘었다. 그 홍백의 토리 또한, 특별한 존재다. 당시의 홍백의 토리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거물 [[엔카]] 가수만이 담당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특히, 홍조의 토리는 10년 연속으로 쇼와의 대표 가희이자 국민가수인 전설 [[미소라 히바리]]가 토리를 맡은 역사가 있어, 바로 [[성역]]이라고 말해도 좋은 포지션이었다. 아무리 노래가 히트하거나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쉽게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그 인기가 무시무시한 모모에라고는 해도, 엔카 가수도 아니고, 게다가 아직 10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가 홍백의 토리를 맡다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야마구치 모모에가 토리로 결정되면서 19세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홍백의 토리를 맡은 것은 일본 가요계 역사의 중대사건이 된 것이다. 그녀는 그 해 히트곡 '플레이백 Part.2'를 부른다. 이때 야마구치 모모에의 나이는 19세 11개월이었다. 이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일본 가요계 최정상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이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역대급 인기로 그녀의 소속사 호리프로의 [[메구로구]]에 세운 자사 빌딩은 '모모에 빌딩(百恵ビル)'이라고 불렸다. 1978년에는 가수로 정상을 차지한 해지만 영화에서도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이 해에는 영화 '돌아보면 사랑'과 '불꽃의 춤'이 개봉한다. 그리고 또 두 편의 영화를 흥행에 성공시킨다. 두 편 모두 흥행 순위 10위안에 안착시키는 등 대단한 티켓 파워를 보여준다. 불과 4년간 영화 10편을 흥행을 시키는 진기록을 보여준다. 가수로나 배우로서나 독보적인 커리어를 보유한 당대의 스타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10.gif|width=100%]]}}}|| || '''절체절명의 무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0517039313906516372.jpg|width=100%]]}}} || || ''' 역대 최연소 홍백 토리로 무대를 펼치고 있는 야마구치 모모에 ''' || [[1979년]] [[1월 17일]], 야마구치 모모에는 20세 생일을 맞이한다. 일본 연예계 최고 자리로 군림하고 있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것이다. 이날 밤 생일 파티는 도쿄 도라노몬 호텔 오쿠라에서 열렸다. 주역은 물론 야마구치 모모에. 초대받은 손님은 모두 800명. 야마구치 모모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거물급 연예인이 축사와 꽃다발을 들고 모였다. 이 파티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무를 선보였다. 그것은 하나야나기 이토유키 스승이 일부러 이 파티를 위해서 창작했다고 하는 '쥬우하츠하루'다. 하나야나기 이토유키라고 하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가 몇번이나 본 그 백댄서 그룹 '하나야나기 이토유키사중'의 리더다. 실은, 야마구치 모모에·사쿠라다 쥰코·모리 마사코의 꽃의 고3 트리오 졸업 콘서트 안무를 한 것도 하나야나기 이토유키다. 모모에는 이 파티에서 "올해야말로 큰 상을 받겠습니다"라고 많은 참가자들 앞에서 야마구치 모모에는 선언했다. 1979년 3월 30일, [[일본방송협회|NHK]]와 야마구치 모모에는 과거 전례 없는 이색 도전을 했다. 그것은 움직이는 화면이 없는, 스틸 사진만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의 방영이다. 이 사진들은 시노야마 노리노부[*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집을 찍은 사진가다.]가 야마구치 모모에를 찍은 사진이다. 시노야마는 모모에가 14살부터 자신의 바쁜 스케줄을 모모에의 스케줄에 맞춰 계속 그녀를 찍어댔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노야마가 모모에를 향해 누른 셔터 수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노야마 노리노부가 계속 찍어 온 14세부터 20세까지의 야마구치 모모에를 뽑은 사진 1500장을 일거에 내보낸다는 대담한 기획이었다. 후일 시노야마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쇼와 시대]]의 고도 성장기 때의 공적인 존재물이었다. 누구나 쇼와라고 하는 좋았던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거기에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4월에는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한 드라마 '일본의 여자 북국에서 온 여자'의 참여한다. 1979년 8월에는 골든 콤비로 불린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공동 출연 영화가 공개된다. 이 당시 영화계에서는 이 둘이 출연하면 반드시 대박을 터뜨린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것이 당시 영화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도호는 새로운 시도에 임했다. 8월에 공개되는 그들의 10번째 작품이 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무려 일반인 공모를 했던 것이다. 상금은 무려 100만엔. 토호에 보내져 온 응모 작품은 무려 1만 1천편을 넘었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완성해 보낸다. 설마 이 정도로 많은 시나리오가 보내질 줄은 도호 기업도 예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선된 작품은 '화이트 러브'. 원작자는 [[나고야]]에 거주하는 나카가와 미치코였으며 29세에 평범한 [[주부]]였다. 이 영화의 제작비에는 무려 1억 5천만엔이 투자되고, 그리고 8억 6000만엔의 배급 수입을 기록해 모모에, 토모카즈 골든 콤비 흥행 불패를 또 한번 증명했다. 이 영화 촬영 중 [[스캔들]]이 터진다. 화이트 러브 촬영으로 스페인으로 날아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 콤비였다. 한정된 시간 내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 이들의 일정은 빡빡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촬영 사이의 얼마 안되는 시간을 찾아내서는 둘이서 관광이나 쇼핑을 즐겼다고 한다. 영화 화이트 러브 개봉 몇 달 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스페인 밀회 사진이 사진 주간지에 특종되고, 그 직후에 야마구치 모모에가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교제 선언을 했다. 스페인에 촬영 중이던 시절의 모모에와 미우라는 그야말로 열애가 한창이었다는 것이다. 팬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둘이 사귄것으로 추측한다. 1979년 8월 23일, 제5회 [[닛폰 테레비]]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매년 여름 열리는 이 가요상 레이스에는 그해 히트곡을 날린 창창한 가수들이 일제히 출전한다. 제5회 니혼TV 음악제의 출전 가수도 그야말로 호화 그 자체였다. [[고 히로미]], [[코바야시 사치코]], 니시시로 히데키, 주디 온그, [[노구치 고로]], 야시로 아키, 나카하라 리에, 와타나베 마치코, [[사잔 올 스타즈]] 등 쇼와 가요사에 찬연히 빛나는 거물급 가수들만 한자리에 모였다. 이 니혼 TV 음악제에서는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노래에 주어지는 「그랑프리」,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에게 주어지는 「가창상」, 장래성이 기대되는 가수에 대해 수여되는 「금비둘기상」등 여러가지 상이 있지만, 시청자가 가장 주목한 것이 잡지 「월간 명성」독자의 투표에 의해 결정하는 「톱 아이돌상」이다. 다른 상들은 누가 어떤 전형기준으로 뽑는지 불투명한데, 이 톱아이돌상은 팬들의 직접 투표로 결정되어 인기의 지표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아이돌상 레이스는 치열했다. 노미네이트 된 아이돌은 이시노 마코, 시부야 텟페이, [[핑크 레이디(가수)|핑크 레이디]], 사카키바라 이쿠에, [[사쿠라다 준코]]가 있었다. 수상자는 당연히 최고의 인기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몫이었다. 또한 1979년 싱글 애염교[* 이 곡은 1994년 [[나카모리 아키나]]가 커버하기도 했다.]의 발매로 모든 싱글 총 판매량이 마침내 1,000만장을 돌파했다. 핑크 레이디, [[모리 신이치]] 이후 세번째로 나온 일본 음악계 싱글 판매량 1,000만장 달성이었다. 2021년 기준 모모에의 싱글 판매량은 1,142만장으로 1970년대에 가장 많은 싱글 판매량을 판 아티스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인지를 초월한 [[신비]]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해요. 얼굴도 내면도 [[보살]] 같다고 저는 생각했고, 그 이미지에서 나온 게 만주사화(만제샤카)라는 노래였습니다.''' >---- >― 사카이 마사토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프로듀서)[[https://fujinkoron.jp/articles/-/3267|#]]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UYteMNG95U, height=240)]}}} || || '''<만주사화>^^(1980)^^. 섬칫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아우라,[br]10대라고 도저히 보기 힘든 중저음의 보컬과 처연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 || 당시 그녀는 가수로서는 10대임에도 40대를 연상케 하는 중후한 보컬링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이점은 이 해 발매한 <曼珠沙華(만주사화)>라는 곡에서 절정에 달하여 엔카에서도 그 기질을 많이 보여주었다. <만주사화>의 경우 아키 요코 작사, 우자키 류도 작곡[* 두 사람은 [[메이지대학]] 동문이자 부부이다. 또 두 사람 모두 가수, 배우 등의 일을 하는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인데, 이 작사/작곡가와 연계하여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곡들이 수없이 탄생된다. 또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좋은 날의 여행"과 "이치에" 등은 평범한 틴에이저 아이돌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인데, 모모에는 이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또한 그녀의 경력이 끝나갈 무렵, 모모에의 음악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장르의 폭도 넓혔다. 대표적으로 그녀의 12번째와 18번째 앨범, 골든 플라이트 그리고 L.A. 블루는 런던과 로스앤젤레스에서 각각 현지 음악가들과 제작진을 이용하여 녹음되었다. 그녀의 21번째 앨범인 <피닉스 전설>은 록 오페라로 쓰여졌다. 그녀가 활동을 끝내기 전에 록 노래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우자키와 아키는 그녀를 위해 "Rock 'n Roll Widow"를 썼고, 이 곡은 콘셉트 앨범 뫼비우스 게임에 수록되었다. 이러한 히트곡을 연달아 내며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는 아이돌을 넘어서 명실상부한 일본의 가희(歌姫)로 우뚝 서게 된다. 1979년에는 평론가 히라오카 마사아키[* 일본의 [[신좌파]] 평론가.]는 "야마구치 모모에는 [[보살]]이다(山口百恵は菩薩である)"라는 [[https://www.amazon.co.jp/%E5%AE%8C%E5%85%A8%E7%89%88-%E5%B1%B1%E5%8F%A3%E7%99%BE%E6%81%B5%E3%81%AF%E8%8F%A9%E8%96%A9%E3%81%A7%E3%81%82%E3%82%8B-%E5%B9%B3%E5%B2%A1-%E6%AD%A3%E6%98%8E/dp/4062193620|평론집]]을 쓴다. 히라오카 마사아키는 야마구치 모모에를 "[[보살]]"로 비유하며 은퇴 이후에도 개정판을 쓰며 그녀를 전설화했다. 그녀는 '''문화인들에게 당시 [[현대]]의 [[일본]]을 상징하는 스타'''로서 다뤄지며, 노래면 노래, 영화면 영화 모두 흥행을 시켜 [[미소라 히바리]]에 필적하는듯한 [[여왕]]이라는 칭호도 받게 된다. [[1979년]] [[8월 25일]], 매년 여름 행사였던 '모모에짱 축제'의 다섯 번째 행사가 신주쿠 코마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해의 모모에짱 축제도 8월 31일의 마지막 날까지 1주일 연속으로 공연되는 대장정이어서, 예년보다 모모에의 열기가 대단했다. 직전기는 연일 심야까지 연습에 힘쓰고 있었다고 한다. 무대는 예년과 같이 뮤지컬과 히트 퍼레이드의 2부 구성. 그러나 1부 뮤지컬은 그동안 취향을 바꿔 고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 됐다. 제목은 '사막의 불사조' 여주인공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것은 물론 야마구치 모모에다. 이 무대의 연출을 다룬 것은 무려 [[다카라즈카 가극단]] 전속의 연출가·우에다 신지[*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우에다 신지는 당시 [[이케다 리요코]]의 인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타카라즈카에서 상연해, 전무후무한 다카라즈카 붐을 일으킨 연극계의 거물이다. 그런 때의 연출가·우에타 신지가 한 사람의 아이돌 무대를 위해서 각본을 써 내려갔다. 당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를 이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무대 협연자도 호화롭다. [[시저]]역에 이노우에 타카오, 안토니오역에 미네기시 토오루 같은 베테랑 배우가 겨드랑이를 굳혔다. 2부 히트 퍼레이드 야마구치 모모에와 함께는 '요코스카 스토리', '플레이백 파트2', '코스모스', '좋은 날 떠나라', '나긋나긋하게 노래해' 등 야마구치 모모에의 대표곡뿐만 아니라, '도쿄의 하늘 아래 당신은', '윈도'라는 환상의 명곡으로 불리는 음악도 선보이고 있다. [[1979년]] [[10월]] [[1일]]과 [[2일]], 도쿄 히비야의 제국극장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그것은 야마구치 모모에 있어서의, 첫 노래에만 의한 리사이틀이었다. 리사이틀의 이름은 사랑이 시로 바뀔 때(愛が詩にかわる時). 이 타이틀명은 야마구치 모모에 자신이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아이돌 리사이틀은 커버곡을 다수 선곡한 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랑이 시를 대신할 때는 모두 야마구치 모모에의 오리지널 곡으로만 구성됐다. 게다가 전체 20곡 중 싱글곡은 6곡에 불과하고 다른 노래는 오리지널 앨범에서 선곡된 것. 리사이틀 구성에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의사도 크게 반영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 날 야마구치 모모에는 불쑥 팬들에게 고백을 한다. '지금 내겐 특정 연인이 있어요' 장내는 순식간에 아주 조용해졌다. 팬들은 대부분 야마구치 모모에의 연인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미우라 토모카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때까지 본인들의 입에서 연인 사이라는 등의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는 사진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믿고는 있어도, 바라고는 있어도, 확신에 이르는 것은 하지 못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팬들은 숨을 죽이고 모모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모에는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서른 조금 전[* '서른 조금 전'이라고 하면 미우라 토모카즈는 그 범주에 든다.]...'이라고 말하고 애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후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二人の恋について真実を語れないことが辛かった、と。)"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0kokuhaku.png|width=100%]]}}} || || ''' 리사이틀의 야마구치 모모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8syasin3.jpg|width=100%]]}}} || || ''' 주간지에 보도된 야마구치 모모에, 미우라 토모카즈 ''' || 그리고 1979년 10월 19일, 둘의 열애 사진이 주간지의 특종으로 실린다. 이 사진을 찍은 기자 후쿠다는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의 자택 맨션 앞에서 잠복하기 시작했다.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교제를 특종사진 형태로 증명하려고 후쿠다는 주간지에 그 기획을 가져갔다. 하지만 차마 두 사람의 꼬리를 잡을 수는 없다. 신뢰할 수 있는 소식통으로부터 야마구치 모모에가 미우라 토모카즈의 자택에서 밀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그러나 전혀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후쿠다의 잠복은 그로부터 11개월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19일 오후 10시 40분 잠복 중이던 현관문에서 모자에 선글라스, 바지 차림의 남녀가 나왔다. 미무라 토모카즈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후쿠다는 그 사진을 찍게 된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후쿠다 후미아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순식간에 일본열도를 석권했다. 1979년 10월 20일, 프리랜서 카메라맨 후쿠다 후미아키가 특종사진을 찍은 다음 날이었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후생연금 홀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있었다. 낮의 부와 같이 밤의 공연에서도 야마구치 모모에는 예정 대로 다섯 번째 곡의 「요코스카 선셋·선라이즈」를 불렀다. 그 직후의 일이었다. "'요즘 주간지 같은 데서 많이 떠드는데...제 애인 얘기 들어주실래요? 엉뚱한 사람에게 폐를 끼쳤지만 이제 말해도 되잖아요."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의 골든 커플은 너무나 유명했지만 뜻밖에도 야마구치 모모에에게는 미우라 토모카즈 이외의 남자와의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모모에가 19세 때에는 무려 1년간 13명이나 되는 남자와 열애, 밀회가 있다고 [[기레기]], 연예 주간지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물론, 그 소문은 모두 가짜였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모에는 이름을 밝힌다. "그 사람 이름은 미우라 토모카즈라는 사람이에요." 오랫동안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힌 듯 행사장 팬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연인선언(恋人宣言)' [* 이 리사이틀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의 고백을 그렇게 불렀다.]은 특종 사진이 찍힌 다음 날이어서 연인 사이라고 고백한 것이 특종 사진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후쿠다 후미아키의 플래시에 터진 뒤에도 미우라 토모카즈와 야마구치 모모에는 카메라를 뺏는 것도 아니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걸었다. '볼 수 있었던 것에 충격은 없었다. 자연스러운 형태로 이야기할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진실을 이야기하자. 활자가 아닌 내 목소리와 내 말로 전하고 싶다.' 나중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회상하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두 사람의 사이에 이미 그렇게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그는 직접 팬들 앞에서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전하고 싶어 했다. 1979년 11월 8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갑작스런 (연인) 선언으로 일본 열도가 흥분 식지 않은 가운데 모모에-토모카즈 콤비가 연인 선언을 한 이후의 첫 번째 영화인 천사를 유혹의 촬영이 시작됐다. 모모에·토모카즈 골든 콤비의 영화라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일본 대중으로부터 주목받아 왔지만, 모모에와 토모카즈의 연애 관계가 공개되었던 것으로 천사를 유혹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일본 대중으로부터의 주목을 끌었다. 천사를 유혹의 제작 발표에서도 언론은 당연하듯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게 교제에 대한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하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과 사생활은 확실히 구별하고 있다며 냉정하게 대응했다. '천사를 유혹'은 [[아쿠타가와상]] 작가인 다카하시 미치쓰나가 1979년에 발표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동 작품은 동거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그 당시의 젊은이의 사랑의 형태를, 케이코(영화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연기한다)와 코헤이(영화에서는 미우라 토모카즈가 연기한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무려 1970년대의 닛카츠 로망 포르노로 청춘영화의 거장으로 불린 후지타 토시하치였다. 후지타 감독은 '톱스타인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를 굳이 평범한 일상생활을 그리는 작품에 투입함으로써 어떤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생기는지를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천사를 유혹은 도호의 설날 영화로 개봉됐다. "연인 선언"에 기인하는 팬 이탈을 걱정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로 끝났다. 개봉 당일부터 극장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연말부터 설까지 하와이에서 지낸다. 이것은 1974년부터의 항례 행사였다.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가 함께 출연했던 글리코의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연인 선언 이후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는 다섯 번째 하와이로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